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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4.26 운명 (임레 케르테스)
posted by oss 2010. 4. 26. 10:58

만일 운명이 존재한다면 자유란 불가능하다.
만일 자유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없다.
이 말은 '나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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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임레 케르테스

지은이 ㅣ 임레 케르테스
1929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케르테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4년에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 부헨발트와 짜이츠 수용소를 전전하다 1945년 종전과 해방을 맞았다. 그는 종전 뒤 부다페스트 일간지 '빌라고사그'의 기자로 2년여 동안 근무하다가 신문사의 국유화로 해고당한 뒤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길을 발견한 사람>, <좌절>,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문화로서의 홀로코스트> 등이 있다. 브란덴부르크 문학상, 라이프치히 서적상, 200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자의 다른 책 [엘리트2000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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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p.
이런 식으로 빵집 주인이 배급량에서 얼마씩 챙긴다는 소문은 나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화가 난 듯한 매서운 눈초리와 능숙한 손놀림을 보자니 어쩐지 이 남자가 유대인을 싫어할 수밖에 없는 진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만일 유대인을 싫어하지 않으면서 유대인들의 빵을 조금씩 떼먹는다면 그것은 도둑질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유대인을 싫어한다는 확신이 있는 경우라면 그것은 확고한 신념에 따른 타당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나는 신념과 행동의 앞뒤 관계가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132p.
우리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내 짐작이 그르지 않다면, 우리가 진실로 기다리는 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상한 기다림과 지루함, 대략 이러한 인상이 아우슈비츠의 실상을 제대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135p.
우리는 오로지 군인들의 걸음에만 맞추어서 방향과 속도를 조정했는데, 어릴 때 우리가 종이 조각과 꼬챙이로 나방애벌레를 조금씩 조정하면서 성냥곽에 밀어넣는 모습과 비슷했다. 살기 위해선 유도하는 대로 끊임없이 마디를 꿈틀대며 움직여야 하는 바로 그 애벌레 말이다.

135p.
그러나 나는 이런 것에 더 이상 집착할 수가 없었다. 여기 우리 옆에 함께 행진하고 있는 이 군인들이 정말 우리과 똑같은 사람인지, 볼질적으로 똑같은 인간적인 질료로 이루어진 존재인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기 때뭉니다. 그러나 어쩌면 내 관찰 방식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똑같은 질료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기 때문이다.

277p.
그러니까 그들은 A에서 Z까지의 알파벳순서처럼 단계적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런 식으로 시간을 경험하는 것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만일 12 X 365 X 24 X 60분 X 60초의 모든 시간이 한순간에 그들에게 닥쳤다면, 그들은 도저히 버텨낼 수 없었을 것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287p.
각각의 1분은 출발을 하고 흘러가다가 다음 1분이 시작하기 전에 끝을 맺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매 분이 어떤 새로운 것을 가져다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 매 분이 무언가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 매 분 동안 우연히 일어났던 것과는 다르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아우슈비츠나 여기 집에서 우리가 아버지와 작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288p.
다만 주어진 상황과 그 안에서 새롭게 주어지는 여건들이 있을 뿐이다. 나도 주어진 운명을 겪어 냈다. 비록 그 것이 나의 운명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것을 버텨냈다. 두 노인은 어째서 내가 지금 분명히 어딘가에 뿌리를 두고 그것과 연결해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이 단지 착각이었고, 사고였고, 일종의 실수였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왜 모르는지,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그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왜 모르고 있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289p.
만일 운명이 존재한다면 자유란 불가능하다. 나는 점점 더 흥분하고 감정에 북받쳐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만일 자유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없다. 이 말은(나는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말을 첨추었다) '나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순간적으로 갑자기 떠오른 말이었는데, 그럼에도 이처럼 분명하게 확신을 가져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