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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10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
posted by oss 2009. 6. 10. 17:03

"나느 당신의 견해에 반대한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그 견해를 지킬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우겠다."

내가 반대하는 견해를 죽이려고 끝까지 싸우는 게 아니라 그 견해가 지켜질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우겠다는 불떼르의 이 선언은, 내가 반대하는 견해를 죽이려고 애쓰는 한국 사회에게 '왜 그래야 하는'라는 물음을 제기합니다. 볼떼르는 이렇게 답합니다. "우리들의 부싯돌은 부딪쳐야 빛이 난다"고. 즉, 서로 다른 견해가 자유롭게 표현되어 부딪칠 때 진리가 스스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견해를, 다르다는 이유로 없애려고 하는 것은 내 견해의 옳음을 밝히기 위해서도 옳지 못한 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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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저자 | 홍세화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 서울대 공대 금속공학과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10월 금속공학과를 그만두고 1969년 다시 서울대 문리대 외교학과에 입학한다. 입학후 대학재학중에는 문리대 연극반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1972년 '민주수호선언문'사건으로 제적당했으나, 1977년 우여곡절 끝에 졸업을 한다. 1977년 부터 79년까지 '민주투위' '남민전' 활동을 시작했고, 1979년 3월 무역회사 해외지사 근무차 유럽으로 갔다가 '남민전 사건'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빠리에 정착한다. 1982년 이후 관광안내, 택시운전 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면서 망명생활을 했다. 2002년 귀국하여 한겨레신문 기획위원으로서 한국 사회에 대한 충고와 비판을 하고 있다.

홍세화 그가 말하는 그 자신은,
"두가지 우연이 있었다. 하나는 프랑스 땅에 떨어진 것. 또 하나는 파리에서 빈대떡 장사를 할 자본이 없었다는 것. 아무 카페든지 한 귀퉁이를 빌려서라도 빈대떡 장사를 해보겠노라고 마누라와 꽤나 돌아다녔다. 그 때 수중에 돈이 좀 있었다면 지금도 열심히 빈대떡을 부치고 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나는 빈대떡을 아주 잘 부친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 대신에 나는 빠리의 빈대떡 장사'? 글쎄, 그건 나도 알 수 없다. 아무튼 두가지 우연과 몇가지 필연, 그리고 서울대 출신이란 게 합쳐져서 지금의 내가 있게 되었다. 나는 나이를 꽤나 먹었지만 나이 먹기를 꽤나 거부하려고 한다. '양철북'의 소년도 아니면서 말이다. 나이 먹기를 거부한다는 게 주책없는 일임을 안다. 그렇다고 거게 하릴없는 수작이라고까지는 생각지 않는다. 장교는 나이를 먹으면서 진급한다. 사병은 나이를 먹어봤자 사병으로 남는다. 실제 전투는 주로 사병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이 사병으로 남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 그럼 나는 끝까지 사병으로 남겠어. 오래 전부터 가졌던 생각이다. 따라서 나에겐 나르시시즘이 있다. 내 딴에는 그것을 객관화함으로써 자율통제 하려고 애쓴다. 그러면 전투는 왜 하는가? 살아야 하므로. 척박하나 땅에서 사랑하고 참여하고 연대하고 싸워 작은 열매라도 맺게 하는 거름이고자 한다. 거름이고자 하는 데에는 자율 통제가 필요치 않다. 욕망이 춤춘다. 그렇다. 나는 살아서 즐거운 '아웃사이더' 이고 싶다.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이고 싶다"(김규항등저,『아웃사이더를 위하여』,아웃사이더,2000)
라고 말한다.

1995년 자전적 에세이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출간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우리에게 똘레랑스라는 말에 대해서 각인 시켰주었던 작품으로 영업용 택시기사 시절 이야기를 중심으로 프랑스에 망명하기까지의 곡절, 그가 바라본 프랑스 사회의 단면,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대학시절의 추억 등 그 애환의 어제와 오늘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1997년 『르 몽드』에 실린 기사묶음인 「진보는 죽은 사상인가」를 번역하였다. 1999년 문화비평 에세이인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출간하였고, 2000년 단행본 『아웃사이더를 위하여』와 격월간 「아웃사이더」를 발간하고 있다.
[예스24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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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개정판 서문
초판 서문
서장 "빠리에 오세요"

제1부_빠리의 어느 이방인

당신은 어느 나라에서 왔소?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
이방인
떠나온 땅
길을 물어가며
아듀! 고물택시
나도 승차거부를 했다
씰비와 실비
망명 신청, 갈 수 없는 나라

제2부_갈 수 없는 나라, 꼬레

회상1: 잔인한 땅
택시 손님으로 만난 한국인들
빠리를 누비며
한 송이 빨간 장미
수현과 용빈에게
회상2: 방황의 계절
회상3: 가슴의 부름으로
뉴옌과 나
마지막 눈물

보론: 프랑스 사회의 똘레랑스

[북스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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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p.
난 투철한 혁명가도 아니었다. 이론가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어떤 정치적 욕구도 나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내 삶의 의미를 되새겼고 그에 충실하고자 했다. 나를 사랑하고 나 아닌 모든 나를 사랑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분열에 저항하여 하나로 살고 싶었다. 그것은 바로 내 가슴의 요구였다. 그뿐이었다.

342p.
나에게는 벗들이 있었다. 생ㄷ각만 해도 가슴이 꽉 차오는 벗들이 있었다. 만나게 되면 짧은 만남이라도 좋은, 아무 말이 없어도 좋은, 아니 차라리 아무 말 없이 다만 소년의 미소를 나누기만 해도 좋은 벗들이 있었다. 아니, 영영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좋을 벗들이 있었다.

345p.
이렇게 보낸 어느 토요일 밤, 6월의 어느 토요일 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일요일 새벽 6시 15분에, 나는 보았다. 아름다운 빠리를. 6월, 새벽의 잔잔한 햇살은 부끄러워하는 빠리를 서서히 벗기고 있었다. 그러나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단지 햇살만이 속삭이는 듯, 빠리는 고요했다. 그리고 나 혼자였다.

그때였다. 바보같이 나는 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달렸다. 이젠 방향도 없었다. 택시가 가자는 대로 달렸다. 나는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연방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계속 달렸다. 빠리는 텅 비어 있었다. 흐르는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그렇게 아름다웠다. 빠리는. 내가 그 새벽애 달린 빠린는 그렇게도 아름다웠다.

372p.
볼떼르는 이렇게 답합니다. "우리들의 부싯돌은 부딪쳐야 빛이 난다"고. 즉, 서로 다른 견해가 자유롭게 표현되어 부딪칠 때 진리가 스스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견해를, 다르다는 이유로 없애려고 하는 것은 내 견해의 옳음을 밝히기 위해서도 옳지 못한 행위가 도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