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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5.04 왕자의 특권 (아멜리 노통브)
posted by oss 2010. 5. 4. 11:35

샴페인처럼 톡 쏘는, 드라이한 소설

누군가가 내 집의 거실에서 죽는다면? 당연히 의사나 경찰을 불러야겠지만 일을 조용히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시신을 부축해 택시를 불러 타고 응급실로 직행하는 것이다. 병원에 도착하면 사망한 이가 택시를 타고 오는 도중에 죽은 것으로 처리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경찰도 택시도 부르지 않았다.
-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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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아멜리 노통브

잔인함과 유머가 탁월하게 어우러진 작품으로 1990년대 프랑스 문학의 독특한 현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잇는 벨기에 출신의 젊은 작가 아멜리 노통브은 1967년에 태어나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 베이징, 뉴욕, 방글라데시, 보르네오, 라오스 등지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25세에 발표한 첫 소설 『살인자의 건강법』으로 천재의 탄생이라는 비평계의 찬사와 19만부 이상의 판매라는 상업적 성공을 거머쥐었다. 이후 발표하는 작품들마다 대성공을 거두며 프랑스 문단에 확고한 입지를 굳힌 그녀는, 『오후 네시』로 파리 프르미에르상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프랑스 학술원 소설 대상을 수상했다. 그 밖에도 알랭 푸르니에상, 샤르돈상, 보카시옹상, 독일 서적상상, 르네팔레상을 수상했고, 『시간의 옷』과 『배고픔의 자서전』은 그해 공쿠르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촌철살인적인 대화감각으로 가득한 아멜리 노통의 책들은 지금까지 전세계 31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자칭 '글쓰기광'인 그녀는 현제 브뤼셀과 파리를 오가며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지금까지 발표된 노통 소설의 특징적 주제는 인간의 행동양식에 내재하는 수수께끼를 간파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또다른 특징으로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에는 어김없이 ‘적’이라 부를 만한 성가신 타인이 등장한다. 대개 그 ‘적’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성가신 침입자나 섬뜩할 정도로 잔인한 가학자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희생자를 모욕하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서 서서히 숨통을 조인다. 이 ‘적’은 내부에서 출현하기도 한다. 『적의 화장법』에서는 공항 대기실에서 연착된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문득 다가와 말을 걸더니 도무지 놓아주지 않는 성가신 인물이 있다. 자신이 범한 강간과 살인까지 털어놓는 그 인물은 알고 보니 꼼짝없이 얘기를 들을 수밖에 없게 된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에서는 물에 빠진 어린아이를 웃으며 지켜보고만 있는 잔인한 보모였고, 혹은 『로베르 인명사전』에서는 발레리나의 꿈을 접게 된 양딸에게 혐오감을 드러내며 박해하는 어머니 였다. 이 ‘적’의 존재와 관련하여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열두 살 때 자기 안에 “창조적임과 동시에 파괴적인 엄청난 적”이 탄생했으며, 그에게 글쓰기란 곧 이 “적과의 결투”라고 밝힌 바 있다. 작가의 내면 깊은 곳에서 집요하게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그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 ‘적’의 존재. 그에게는 “이 세상에서 없어서 안 될 것”이 바로 이 ‘적’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작품을 살펴보면, 『오후 네 시』는 은퇴 후 조용히 여생을 보내기 위해 외딴 지방으로 이사한 에밀과 쥘리에트 부부에게 오후 네 시만 되면 매일같이 찾아와 '네' '아니오'의 대답으로 두시간을 버티는 한 남자가 벌이는 이야기이다. 인간 내면의 모순과 열정을 단순한 구성과 우의적인 대사를 통해 형상화해 작가의 역량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이 소설은 단순함과 블랙 코미디, 괴담 등 순차적으로 이어지는 색다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에게 이웃은 어떤 존재인가? 현대인들에게 이웃이란 타인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웃은 매일같이 주인공의 집에 같은 시각에 찾아와 말없이 두 시간 동안을 앉아 있다 간다. 그는 관계를 맺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이웃이 하는 말이라곤 묻는 말에 <예, 아니오>로 대답하는 것이며 그 이상의 관계를 맺기 위한 적극적인 행위는 하지 않는다. 타자를 통한 자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라는 고전적인 주제가 특이한 설정, 간결한 대화, 흥미진진한 전개를 통해 형상화되고 있다. 사회적으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목숨만을 유지하고 있을 때 이것을 죽은 것이라고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살해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가볍고 밝은 소설의 밑바닥에 사변적이고 심오한 철학이 도도하게 흐르며, 이 소설을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예사롭지 않은 소설로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1999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을 수상해 유럽 문단의 이목을 집중시킨 『두려움과 떨림』은 일본 사회의 경직성을 고발한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이다. 일본 회사의 견습 사원이 겪는 엄격한 명령 체계, 주종에 가까운 복종 관계, 비효율적인 정차와 형식 등이 풍자적인 시선으로 묘사되고 있다. 현실을 치열하게 그려낸 수작으로 수직적이고 획일화된 사회의 중압감을 피아노 선율 같은 세밀하고 가벼운 터치로 승화시켰다.

이 외의 작품으로 『사랑의 파괴』『시간의 옷』『살인자의 건강법』『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앙테크리스타』『불쏘시개』『머큐리』『공격』『배고픔의 자서전』『아담도 이브도 없는』등이 있다.

저자의 다른 책 [YES24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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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p.
뜨거운 물에 몸이 노글노글해졌다. 행복했다. 팔팔 끓는 국물 속에 퐁 빠진 말린 버섯의 심정이 바로 이렇겠지. 왕년의 부피를 되찾는다는 건 아주 유쾌한 일이다. 나는 늘 저온 건조시킨 채소들을 불쌍히 여겨왔다. 몸의 수분을 죄다 잃었는데, 인생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포장지를 읽어보면 말린 채소에도 고유의 특성이 모두 보존된다고 씌어 있다. 뻣뻣한 마분지 같은 채소들에게 물어보라지. 보나마나 얘기가 다를걸? 썩지 않는다니, 지겨워서 어떻게 하라고!

146p.
샴페인을 마시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다. 열다섯 번째 모금과 열여섯 번째 모금 사이, 모든 인간이 귀족이 되는 순간 말이다. 아주 사소한 이유로 인해 인간은 이 순간을 포착하지 못하고 지나간다. 뭐가 그리 급한지, 취기의 절정에 도달하려고 마시고 또 마시다가 고결하기 그지없는 이 순간을 그만 술에 빠뜨려버리고 마는 것이다.